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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혼돈의 69시간 근로제…5개월 논의, 3개월 다듬기, 8일 만에 재검토?

[취재파일] 혼돈의 69시간 근로제…5개월 논의, 3개월 다듬기, 8일 만에 재검토?
'주 69시간 근로제'로 연일 시끄럽다. 지난 6일 발표된 근로시간 개편안은 1주일 단위의 근로시간 산정 기준을 월, 분기, 반기, 연으로 확대하게 하는 게 핵심이다. 현행 주 52시간 근무를 유연화해 주당 최대 69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하는 제도로 노동자를 위한 유연근로제라고 홍보했지만, 실제 노동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사실상 주 69시간 근무제가 굳어질 것"이라는 불안, "공짜 야근이 심해질 것"이라는 비판의 말이 쏟아졌고, 초과 근무시간을 적립해 장기휴가를 쓸 수 있게 한다는 '근로시간저축계좌제'도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는 말이 나왔다.

이번 개편안, 불쑥 나온 건 아니다. 대선 때부터 대통령이 진두지휘해 온 노동개혁 1호 정책으로, 정부는 지난해 6월부터 주 69시간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로 구성된 연구회가 다섯 달 동안의 논의 끝에 지난해 12월 권고안을 내놨고 이후 석 달 동안 다듬는 과정을 거쳐 지난 6일에 정부가 정책을 내놨다. 이번 입법안을 내놓으면서 노동부 장관은 "역사적인 진일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정책 발표 8일 만에 대통령의 "재검토" 지시가 내려졌다. 갑작스러운 재검토 지시의 이유로 대통령실은 "69시간이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설명을 붙였다.

대통령의 재검토 지시 이후 정부와 국회는 한 목소리로 현장의 목소리를 잘 듣고 정책에 반영하겠다고 한다. 그동안은 의견 청취를 못 했던 걸까, 아니면 안 했던 걸까.

52시간→69시간? 근무시간 늘어나나

주 최대 69시간 근로

'주 69시간 근로제'라는 표현 때문에 실제 근무시간이 늘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정부안은 '주 52시간제' 틀은 유지하되 연장근로 시간의 '관리 단위'를 다양화하는 것이다. 현 '주 52시간 근로제'는 기본 40시간 근무에 '주 12시간' 이내로 연장근로를 제한한다. '주 12시간'으로 묶인 연장근로를 '월 52시간', '분기 140시간', '반기 250시간', '연 440시간' 안에서 노사 합의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안이다. 이렇게 관리 단위를 월, 분기, 반기, 연 단위로 확대하면 현행보다 실제 연장근로의 총량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특정 주의 경우 최대 '주 69시간'까지 근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주 69시간 근로제'로 불리는 것이다. 가령 첫째 주에 69시간(기본 40시간+연장 29시간)을 일하고 둘째 주에 63시간(기본 40시간+연장 23시간)을 일하면 한정된 월 연장근로 52시간을 모두 사용했기 때문에 나머지 3~4주에는 기본 40시간만 근무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부는 연장근로시간 관리 단위가 분기, 반기 등으로 길어지면 과도한 장시간 근로가 가능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인식하고 있었다. 개편안을 발표하며, 만약 관리 단위를 분기 이상으로 하는 경우엔 '4주 평균 64시간' 준수 의무도 부과하기로 했다. 업무가 몰리는 기간에 연장근로를 집중 투입하더라도, 노동자는 4주 평균 64시간 이상 일해선 안 되는 것이다.
 

근무시간이 늘어나지 않는데 왜?


"있는 연차도 못 쓴다", 문제는 '제대로 쉴 수 있는가'이다. 개편안의 취지와 향후 개선될 점들만 나열해놓고 보면, 정책의 문제는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선 '포괄임금제 때문에 야근수당을 제대로 못 받는 노동자', '상사 눈치 보느라 휴일 근무로 생기는 휴가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노동자'도 있다. 그들에겐 몰아서 쓰는 '주 69시간'의 근무 후 '꿀 같은 휴식'을 기대하긴 쉽지 않다. 그래서 '근로시간 개편안'에 대한 기대보단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실제로 직장인들이 주어진 17일의 연차 중 11일만 쉬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2년 전국 일-생활 균형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1년 1년 동안 이직 없이 같은 직장에 다닌 임금근로자 중 연차 휴가가 정해진 경우 부여받은 휴가 일수는 평균 17.03일로, 이 중 실제로 사용한 연차 휴가 일수는 11.63일에 불과했다. 연차수당을 받기 위한 경우가 가장 많았지만(20.1%), 대체인력이 부족해서(18.3%), 업무량 과다(17.6%), 상사 눈치가 보여서(11.4%) 등도 휴가를 못 쓴 이유로 꼽혔다. '몰아서 일하고 푹 쉬라'는 정부의 개편안 취지가 무색한 조사 결과다.

근로시간 개편안 비현실적 쏟아지는 지적
"희망은 주 37시간, 연차도 다 못 써"…현장 거리감 '뚜렷' - 인터뷰 中
직장인 A "경쟁 속에서 그 상사가 원하는 노동시간을 안 하면 무조건 찍히거든요. 그게 이제 현실이기 때문에…."
직장인 B "(무조건 쉬게끔 그렇게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주겠다 한다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노사 합의'를 통해 적합한 근로시간제를 선택할 수 있냐는 우려도 있다. 기업의 규모가 작아질수록 노조 가입률이 적은 상황에서, 제대로 된 노사 합의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걱정이다. 고용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전국 노동조합 조직 현황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국내 근로자 2058만 명 중에 노조 조직원 293만 명에 불과하다. 노조 가입률은 14.2%에 불과한 건데, 규모별로 따져보면 300명 이상은 46.3%였던 노조 가입률이 10-299명 10.4%, 30-99명 1.6%, 30명 미만 사업장의 경우 0.2%에 불과했다. 꼭 이런 수치를 외우지 않더라도, 실제 중소기업 종사자들은 노사 합의를 통해 합리적으로 근로시간을 정할 수 있다는 기대를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청년층이 좋아할 거라는 근로시간 개편안


무엇보다 젊은 층, 이른바 MZ 세대 노조까지 반발하면서 '근로시간 개편안을 MZ 세대가 선호할 것'이라던 정부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지난 6일 정부안이 발표된 직후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2030 청년층 같은 경우도 다들 좋아한다. 선진국에서 이미 시행을 많이 하고 있는 제도다. 노사 합의사항이기 때문에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정식 노동부 장관도 "요새 MZ 세대는 '부회장 나와라', '회장 나와라' 할 정도로 권리의식이 굉장히 뛰어나다"면서 69시간 제도의 악용 우려를 일축했다.

하지만, 정작 MZ 세대 노조인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는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는 노동자 근로조건을 개선해 온 국제사회 노력과 역사적 발전 과정에 역행한다"라고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유준환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 의장 (사진=연합뉴스)
유준환 /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MZ노조) 의장(지난 16일, 국회 토론회)
"주 52시간을 초과해야 한다는 주장은 적어도 노동자 쪽의 주장은 아니다. 흔히 예시로 드는 IT나 게임업계 종사자도 과도한 근로를 악습으로 보고 있다. 노동자에게 유연한 선택지도 필요하다. 보통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쓴다는 건 (기본 근로시간) 주 40시간을 기준으로 떠올리지, 연장근로 시간을 유연하게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일부 기업들에선 주 52시간 상한 때문에 '공짜 야근'이 생기고 있다. 장시간 근로가 있음에도 임금을 제대로 못 받는 경우다. 이런 문제는 근본적으로 공짜 노동을 시키는 기업의 문제지, 연장근로 유연화를 통해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개편안을 통해 더 큰 과로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과도한 연장근로를 '극단적 경우다', '그럴 일 없다', '감독 철저히 하겠다'라는 말보다는 적어도 개편안에 대한 이런 우려로부터 노동자를 두텁게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을 넣거나, 현행에서도 근로감독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바뀌는 모습을 먼저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 이번 개편안은 취지가 불분명하고, (노동자들의) 우려점을 충분히 해소하지 못해 반대할 수밖에 없다."

지난 6일 공개된 근로시간 개편안은 다음 달 17일까지 40일간의 입법 예고기간을 거친다. 이후 6~7월 근로기준법 등 관련 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게 된다. 입법예고 기간은 이해 당사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기 위해 마련된 시간이다. 비록 대통령이 '69시간까지 될지 몰랐다'는 이유로 재검토 지시를 했다고 하지만, 이제라도 정부와 국회가 '현장의 의견을 듣고 제도를 보완하겠다'라고 말하는 건 그나마 긍정적이다. 다만 의견 청취에 앞서 지금 혼란의 원인을 '홍보 부족' 탓으로 돌리는 건 위험해 보인다. 앞선 고위당정협의회에서 김대기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지난주 근로시간 유연화로 갈등이 있었다"면서 "69시간이라는 극단적이고, 일어날 수 없는 프레임이 씌워져 진의가 전달되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5개월간의 논의, 3개월간의 다듬기 과정을 거쳐 낸 근로시간 개편안이다. 이제라도 의견을 경청하는 게 다행이라지만, 반대로 말하면 기본적으로 여론 수렴도 제대로 안 하고 개편안이 발표했다는 걸 자인한 격이다. 몰아서 일하고 푹 쉰다는 것이 실제 노동 현장에선 쉽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것부터가 재검토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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