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럭비 대회에서 홍콩 국가 대신 시위대 노래 연주
홍콩 측은 발끈했습니다. 대회 주최 측에 항의했고, 주최 측은 경기가 끝나고 시상식에 앞서 한국어와 영어로 공개 사과한 뒤, 중국 국가 '의용군 행진곡'을 다시 틀었습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홍콩 정부는 이튿날인 14일 '폭력적인 시위, 독립 운동과 밀접히 연계된 노래가 중국 국가로 연주된 것에 개탄하고 강력히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습니다. "홍콩럭비연맹에 자세한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고, 주최 측인 아시아럭비연맹에 강력한 항의를 전달하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홍콩 주재 한국 총영사를 불러 강하게 항의한 데 이어, 홍콩 행정 수반인 존 리 행정장관이 직접 나서 경찰 조사를 지시했습니다. 리 장관은 14일 밤 기자들에게 "현장에서 연주된 노래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면서 "국가법이나 다른 홍콩 법을 위반하려는 음모와 관련이 있는지 홍콩 경찰이 조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홍콩 밖에서 벌어진 일을 어떻게 조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홍콩 정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홍콩 경찰은 법에 따라 조사할 것이다"라고 말해 한국 담당자들에 대한 조사 가능성도 열어 뒀습니다.
'홍콩 럭비팀 해체'·'한국 개최 금지' 주장까지 나와
심지어 홍콩 럭비 대표팀을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우리의 국회 격인 홍콩 입법회의 주니어스 호 의원은 "선수들이 국가가 모욕 당하도록 했다"며 "유일한 해결 방법은 팀은 해체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이클 룩 의원과 매기 찬 의원도 "이 사건은 모든 중국인에 대한 모욕"이라고 관련자들의 엄중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나아가, 로니 웡 홍콩올림픽위원회 명예사무총장은 "한국이 국제 럭비 대회를 개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한국이 럭비 대회를 개최할 경우 홍콩팀을 보내지 않아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초임 직원이 인터넷에서 내려받는 과정에서 실수"
단순 실수라는 해명과 거듭된 사과에도 홍콩 정부가 경찰 조사 운운하며 강경 대응 방침을 밝힌 데에는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홍콩 정부와 친중파 의원들이 중국 본토에, 새로 출범하는 시진핑 집권 3기 지도부에 잘 보이기 위해 선제적으로 대응했다는 해석도 있고, 홍콩 내부적으로 반중국 정서가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강도 높게 대응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앞서 민주화 시위 당시 럭비 경기장 등 공공장소에서 중국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이 울려 퍼지면 많은 홍콩 시민들이 야유를 퍼붓곤 했습니다. 또, 이번 기회에 다른 나라들에도 홍콩은 중국의 일부임을, 국제 경기 대회에서 반드시 '의용군 행진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려 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중국 외교부 "이미 사과한 일"…홍콩 기류 '급변'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 외교부의 이런 반응을 한·중 관계 개선에 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다는 신호로 해석했습니다. 한·미·일 공조 강화 등 복잡한 지정학적 상황에서 이번 사건이 확대될 경우 한·중 관계가 악화해 중국을 난감한 입장에 빠뜨릴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 매체는 이어 중국 외교부 브리핑 이후 홍콩의 기류도 바뀌었다고 전했습니다. 한국에 대한 강경 대응 목소리가 잠잠해졌다고 했습니다. 많은 입법회 의원들이 공개적인 논평을 피하고 있으며, 나아가 초기 대응이 잘못됐다는 얘기도 나온다고 보도했습니다. 매체에 따르면, 중국 본토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정치 거물은 "이 사건은 찻잔 속의 폭풍"이라면서 "국가적 차원의 사건으로 끌어올릴 가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한 중진 의원은 "충성주의자들이 중국 정부로부터 점수를 따기를 원했지만 한·중 관계 개선에 대한 여지를 읽지 못했다"고 지적했고, 다른 의원도 "확실한 증거도 없이 국가 안보 침해를 내뱉는 바람에 홍콩의 세계적 명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다"고 비판했습니다. 선봉에 섰던 홍콩 정부와 친중파 의원들이 머쓱하게 됐습니다. 매사가 그렇듯 정도가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과유불급.
(사진=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