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마!"
소녀는 깜짝 놀라며 얼떨결에 울음을 그칩니다. 그리고는 자리로 들어와 마음을 진정시키며 도복 소매로 볼가에 남아 있던 눈물을 닦아냅니다. 곧이어 차례가 온 송판 격파에서 그녀는 단단한 기합과 함께 작은 주먹을 내뻗으며 송판을 둘로 쪼갭니다. 모두가 손뼉을 치며 환호하고 굳어 있던 심사관의 표정에 미소가 스쳐 지나갑니다. 이는 지난 19일 자타리 태권도 아카데미에서 열렸던 띠 승급식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입니다.
이곳 난민들은 대부분 시리아 반군이 점령했던 지역에서 왔습니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 온 이들이 많지만, 현 시리아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도 상당합니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캠프 내 임시 거주 공간에 시리아 자국기를 걸지 않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난민들은 요르단 수도나 다른 도시에서 거처를 구해 살고 있습니다. 난민 캠프에 머무르는 이들은 사실 빈곤층입니다. 문제는 캠프에 살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부모들조차 먹고살기 힘드니 그 아이들은 오죽할까요? 캠프 내에 학교를 비롯해 아이들을 위한 시설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들은 사실상 허허벌판에 '내버려 져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방치돼있는 게 현실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 학교는 오일머니의 재력을 바탕으로 시설에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그에 비해 민간단체의 돈으로 운영되는 자타리 태권도 아카데미는 시설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곳은 시리아 학부모와 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학교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학교 밖에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원이 따로 없습니다. 사방이 모래뿐인 허허벌판에 슬레이트 철판들로 지은 주거용 가건물이 전부입니다. 여기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놀이란 기껏해야 벌판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 던지는 정도입니다. 그렇다 보니 학교 안은 그야말로 아이들이 내전의 상처를 잊고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천국인 셈입니다.
취재 중인 제게 먼저 말을 걸어온 10살짜리 여학생인 할라 아브라함은 3년 전부터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벌써 밤색 띠를 땄다고 자랑했습니다. 태권도를 배우면 뭐가 좋으냐고 물어봤더니 "학교 밖에선 놀 데가 없고 답답한데, 이곳에선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태권도를 배우고 또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도 있으니 너무 즐겁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실력을 보겠느냐며 그 자리에서 익혔던 품새를 선보였습니다.
이곳 아카데미는 단순히 태권도 기술만 가르치는 건 아니었습니다. 빨간 띠 이상부터는 자신보다 낮은 띠의 아이들 7명을 맡아서 소그룹 리더 역할을 합니다. 리더는 늘 실력이 부족한 아이들을 가르쳐주고 보살피며 낙오자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검은 띠 이상으로 계속 올라갈 수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 걸까요?
처음 난민 캠프에 온 아이들은 오랜 내전과 빈곤에 시달린 탓에 생존본능이 유독 심합니다. 구호물품을 나눠줄 땐 하나라도 더 받고자 남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습니다. 줄 서기와 같은 질서 개념은 전혀 없습니다.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 탓에 별것 아닌 일에 폭력성이 분출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지나가는 차량에 이유 없이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는 이들도 있습니다.
태권도는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건전하게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태권도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은 하루라도 빨리 높은 띠를 따는 데 열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누군가를 보살피고 이끄는 리더십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타인을 살피고 협동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아래 사진은 이날 승급식을 치르기 전 20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줄을 맞춰 도열한 모습입니다. 이런 질서 있는 모습은 몇 년 전만 해도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생각난 김에 히샴에게 한국이란 나라를 어떻게 생각나느냐고도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그는 "한국도 과거 전쟁을 겪었지만 지금은 잘살고 있지 않느냐"며 "시리아도 이번 내전이 끝나면 한국처럼 훌륭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건넸습니다.
구호물품은 난민들의 삶에 순간적인 도움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난민들이 세계의 골칫덩이로 추락하지 않고 사람답게 제구실을 할 수 있으려면 그에 맞는 인성 교육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 교장은 "지금 각지에 흩어져 있는 시리아 난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심점이며, 이를 위해서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 가르칠 수 있는 리더십을 키워줘야 다시 나라를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태권도는 최적의 방법이라는 겁니다.
라마단 시작과 함께 자타리 태권도 아카데미는 이제 한 달간의 방학을 맞았지만, 지금도 교문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