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어느 이름 모를 시인묵객은 폭포를 노래하고, 폭포는 그저 남의 일인 양 오늘도 그렇게 떨어지고 부서지며 또 멀어져 간다. 그들의 쉼 없는 발걸음은 강을 향하고, 또 바다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갈 길이 먼 탓에 폭포를 벗어난 물줄기의 흐름은 다급하고 또 다급하다.
용추폭포를 지나자, 다시 옛길이 나온다. 옛길에서의 흉흉한(?) 자빠짐의 트라우마가 슬핏 뇌리를 스쳤지만, 그렇다고 주어진 길을 마다할 수야 없지 않은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는 여우와 어린 왕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우는 말한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결국 누군가, 또 무엇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게 내 품을 내어주고 또 그 품을 안을 때에나 가능하다는 말일 것이다. ’길들여진다‘는 날 것의 이 표현이 품고 있는 깊은 의미에는 어쩌면 길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살다 보면 기쁜 일 만큼이나 슬픈 일도 있고,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으며, 일어서는 것만큼이나 넘어지는 경우도 허다한 것처럼, 길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러니 길 위서건 인생에서건 넘어졌다고 울지 말지니... 그냥 가보는 것이다.
옛길을 벗어나자 돌탑 군락이 보인다. 수많은 염원들이 모이고 모여 탑이 된 곳. 그렇게 계곡의 돌들은 마음 하나씩을 담은 채로 탑이 되어, 여행자를 굽어본다.
돌탑을 쌓은 그 염원을 어찌 짐작이야 할 수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마음과 정성을 모으는 이러한 소소한 의식들이 모여, 스스로를 낮추고 경계하며, 또 내부의 긍정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데는, 작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일부러 철자를 틀리게 쓴 것이 아니라면 조선시대에 세워진 비석이 아닐까 싶다. 역시나 맞춤법에 비춰 조선 영·정조 시대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산불됴심> 비석이 단순히 호기심의 대상이 아닌 문화재적 가치 또한 높다고 한다. 이유는 한글 창제 이래 구한말까지 세워진 비석 중에서 유일하게 한글로만 새겨진 비석이라고 한다. 추정해 보면, 그 당시에도 산불은 반드시 막아야 할 재난으로, 그래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자인 한글로 비석을 세웠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길 한 켠에서 무심히 돌아가는 물레방아를 지나자, 멀리 조곡관(鳥谷關)이 보인다. 제2관문이다. 조곡관은 문경새재의 관문 중 제일 먼저 세워진 관문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2년 후인 1594년에 설치되었다.
조곡관을 증개축한 숙종은 제2관문에서 3㎞ 떨어진 곳에 제1관문을 세우고 초곡성(草谷城, 주흘관)이라 하였고, 새재 위에 조령(鳥嶺)산성을 쌓았으니 이것이 제3관문으로 현재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조령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조곡관을 지나자, 길은 품었던 옛길을 다시 내어 놓는다. 그 이름도 예술스러운(?) ‘한시(漢詩)가 있는 옛길’이다. 문경새재를 소재로 하여 지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들이 바위 위에 새겨져 그 옛날의 감상과 새재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모였다 흩어지는 뜬구름 같은 것
이제 나 홀로 산으로 가노라니
푸른 숲 사이로 노을이 진다.
길 가장자리를 수놓은 여러 시비 중 <새재에서 이별하며 주다>라는 제목의 시다. 아마도 산으로 떠나는 시인묵객이 배웅 나온 누군가에게 건넨 시인 듯한데, 인생무상... 공을 세워서 이름을 날린들 그것이 뜬구름과 다를 것이 무어냐는 묵객의 회한이 새삼 마음에 와 닿는다. 아웅다웅하며 이름을 알리고자 애를 써보았지만, 그마저도 결국에는 무상한 허명(虛名)이었음을 그는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새삼 에리히 프롬의 명저인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길 위에서 무슨 머리 아프게 소유니 존재니 떠드느냐고 하겠지만, 길 위에 서면 드문드문 찾아오는 성찰의 기회와 무심함에 스스로의 삶을 들여다보게도 되지 않던가. 특히나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더욱 이를 강제한다.
에리히 프롬에 따르면, 인간의 생존 양식은 물질적인 재산, 지식, 권력, 명예 등의 소유에 전념하는 ‘소유적 실존 양식’과 삶에 대한 고찰과 경험을 통해 자기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삶의 희열을 확신하는 ‘존재적 실존 양식’, 이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지만 무한 증식하는 소유욕은 그 특성상 채우면 채울수록 오히려 더 부족하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그래서 그들은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더욱 더 소비에 열을 올리게 된다. 그들에게는 노동마저 소유물을 교환하는 수단일 뿐인지라, 더 많이 갖기 위해서는 더 많이 일을 해야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더 나아가, 소유적 실존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삶과 죽음이라는 섭리 앞에서 온갖 두려움에 괴로워하는 반면, 존재적 실존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조차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유적인 사람은 ‘과거, 미래’에 집착하지만, 존재적인 사람은 ‘여기, 지금’의 삶을 중시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우리 모두가 지향하고, 또 갈망하는 ‘여유 있게 사는 것보다는 부자가 되어야 하고, 잘 사는 것보다는 출세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굳건한 믿음에 대한 단 한 번의 의심과 반성, 성찰이,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계속>
▶ [라이프] 길 위에서 꿈을 꾸다 - 문경새재 과거길 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