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작품이 예술품이면서도 동시에 '돈'으로 가치가 매겨지고 거래가 되는 '상품(?)'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보니, 위작은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미켈란젤로도 배고팠던 신진 시절, '위작'을 팔아 먹고 살았다고 하니, 위작의 역사는 참으로 길고도 길다.
우리 미술계에서 위작은 어떻게 제작되고 거래되어 왔을까? '미인도 위작작가'로 유명세(?)를 떨친 권춘식 씨의 입을 빌어 조금이나마 '위작의 세계'를 짐작해보려 한다.
우리나라에서 위작 제작이 활발했던 건 70~80년대였다. '미술 붐(boom)'이 일어났던 시기로, 진품은 전에 없이 비싼 가격을 형성하며 팔려나갔고, 위작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주로 화랑이나 중간상인들을 통해 위작작가들에게 알음알음 의뢰가 들어왔다. '선물용'이라고 하면 알아서 '위작'을 그려주던 시기였다.
당시 천 화백 작품처럼 고가의 작품은 수백만 원에 거래가 되고 있었다. 위작 작가들은 보통 진작 가격의 10분의 1 정도를 받았다. 수고비는 수십만 원 정도였다. 나머지는 수수료 명목으로 중간 상인과 화랑에서 가져간다. 서명까지 똑같이 위조하는 등 위험 부담이 큰 경우에는 '위험 수당' 조로 조금 더 쳐서 받기도 했다.
위작 작가들은 대부분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교육은 받지 못했다. 그림 수정 작업을 하거나, 위작을 그리는 스승 밑에 들어가 도제 형식으로 배우면서 이 길에 뛰어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위작 세계에서는 A작가의 그림은 B가, C작가의 그림은 D가 잘 그린다는 소문은 돌고 있지만, 위작 작가들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 같은 스승(?) 아래 '동문수학'한 위작 작가들 정도 서로 알고 지내지만, 서로 아는 티를 내지 않는 게 이 바닥의 원칙이다.
구도와 형태를 최대한 비슷하게 표현하기 위해 원본을 가로, 세로 줄을 그어 모눈종이 무늬를 그려넣은 뒤, 그걸 위작을 그리는 종이에 똑같이 칸을 맞추어 밑그림을 따라 그렸다. 먹지를 구하기 쉬워진 뒤로는, 먹지를 사서 대고 뾰족한 도구로 눌러서 밑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최근에는 아예 복사기로 복사해서 밑그림을 옮기기도 한다. 서울 모처에는 이런 복사를 전문적으로 해주는 업소가 있기도 하다.
그림을 새 종이에 그리면 깨끗하고 '새 것'인 티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에, 원작 제작 시기의 것으로 보이기 위해 일부러 까마중 물을 칠한다고 했다. 까마중 열매를 짓이겨서 물감을 만들어서 칠하면 '오래된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권 씨는 요즘은 미술시장이 '투명'해져서 위작 의뢰도, 판매도 쉽지 않다고 선을 그었다. 또, 자신은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금방 탄로가 나기 때문에 더 이상 의뢰도 들어오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업계에 몸을 담고 있는(혹은 담고 있었던) 그가 100% '사실'만을 말했다고 믿을 수는 없다. 다만 위작 작가들이 발각되지 않는 한 '음지'에 숨어있기에 접촉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미인도 사건'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권 씨의 말을 통해 그나마 추정을 해볼 뿐이다.
세계 미술 시장에서도 위작 논란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세계적인 경매사 소더비나 크리스티도 예외는 아니다. 오죽하면 소더비는 감정전문회사까지 인수했다고 하지 않는가. 고가의 그림이 있는 곳에는 위작도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진위 논란을 애초에 차단할 수 있는 투명한 거래 시스템, 논란이 있더라도 공신력 있게 판단할 수 있는 감정 기관과 전문가, 건강한 논의의 장이 있다면 '위작 공방'이 나더라도 '진흙탕 싸움'으로 번지는 건 막을 수 있지 않을까.
▶ [취재파일] 유명(?) 위조작가 권춘식의 '미인도' ①…"미인도는 '진품'…이제 말 안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