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가 도착하자마자 기자실에서는 “국정 교과서 현장 적용 1년 유예”란 말이 삽시간에 퍼졌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추진으로 1년 넘게 국론 분열과 갈등을 조장한 교육부가 뒤늦게나마 민심을 받들어 국정 역사 교과서 폐기 수순을 밟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뒤따랐다.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고 순리라는 분석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기자들의 예상은 틀렸고, 빗나갔다.
중요 정책을 발표할 때는 보통 1-2시간 전에 보도 자료가 나오는데 이번은 꿀 먹은 벙어리였다. 기자들이 술렁거리자 대변인실 직원은 발표 15분 전 쯤 기자실로 와 “국정화 1년 유예와 국.검정 혼용” 이라고 발표 내용을 미리 귀띔 해줬다.
이준식 교육부 장관은 지난 21일 국회에서 국정화 반대 의견이 63%, 찬성 의견이 35%라고 현장 검토본 웹 공개 여론조사 결과를 밝혔다. 또 전국 역사 교사 모임과 480개 교육,시민 단체가 참여하는 한국 국정화저지네트워크는 줄곧 국정화 반대와 국정 교과서 폐기를 촉구하고 있다. 전국 102개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들도 국정화 중단에 동참했고, 주말마다 전국에서 타오르는 촛불은 국정화 반대, 즉각 폐기를 외치고 있다.
이런 여론에도 불구하고, ‘국정화 1년 연기’에서 후퇴해 ‘국. 검정 혼용’과 ‘내년 연구 학교 적용’을 하겠다는 것은 민심과 야당 뿐 아니라 새누리당 친박, 청와대에 양다리를 걸치고, 끝까지 눈치를 살피며 줄타기를 하겠다는 꼼수다.
하루 만에 뒤바뀐 교육부의 꼼수 뒤에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 대행의 입김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당초 교육부는 검찰 수사 결과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 농단의 공범으로 드러나고, 탄핵안이 국회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가결되자 국정화 추진 동력이 상실된 것으로 판단하고 적용 시기를 1년 연기해 정권이 바뀌면 자동 폐기하는 출구 전략을 짰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준식 장관에게 이 같은 결정이 교육부가 독자적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어느 기관과 상의했는지 물었다. 이 장관은 “ 행정적 절차에서는 교육부 장관이 권한이 있지만, 국가 정책이 행정 절차로만 진행되는 게 아닌 만큼 여러 기관과 협의해 최종안을 도출했다”고 말했다.
국정 교과서를 둘러싼 갈등이 해소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는 “반대하는 사람들의 지적이 다양성이 확보되지 않았다, 졸속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검정 교과서도 선택할 수 있으므로 다양성 부분도 확보했다.”며 “대다수가 반대하고 있다고 하지만 찬성하는 분들도 적지 않은 숫자다, 교육부가 좌고우면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교육부는 지난해 국회의원들도 모르게 국정 교과서 제작에 필요한 예산 44억 원을 기획재정부 예비비로 몰래 신청 하는 꼼수를 부렸다. 국정화 구분 고시 전 국민 의견 수렴도 끝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처음부터 민심보다 중요했던 것은 청와대였다. 갈등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심에 귀 닫고, 국민 여론을 무시했다가 탄핵 위기에 놓인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민심을 어기고 성공한 정책과 지도자는 없다.
이 장관은 자신에게 주어진 법적 권한을 민심을 받들어 제대로 행사했어야 했다. 기대난망이긴 하지만 장관직을 걸고라도 결기를 보였어야 한다. 교육부는 국정 교과서를 올바른 역사 교과서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슴을 보고 아무리 말이라고 주장한들 국민 눈에는 그냥 사슴만 보일 뿐이다.